대학사계

수업이라는 것이 그렇다. 선생이 들어와 강의하고 나가면 다가 아니다. 학생이 제대로 배울 수 있어야 의미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강의 내용이 충실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내용의 강의라도 학생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좋은 강의라 부르기 어렵다. 재미있는 강의가 되려면 같은 내용이라도 수준에 경사를 두는 것이 좋다. 처음에는 쉽게 나가다 점차 어려운 주제를 다루는 것이 좋다. 처음부터 끝까지 비슷한 강도로 한 주제씩 나가는 강의는 지루하고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 또한 중요한 대목은 다각도로 반복할 필요가 있다. 선생은 분명 가르쳤는데 학생은 별 기억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선생 책임이 크기 쉽다. 자기는 아는 내용이지만 학생들에게는 생소한 것이기 때문에 늘 학생 눈높이에서 강의가 진행되도록 신경 써야 한다. 교수 중심으로 진행되는 강의치고 제대로 된 경우를 보기 힘들다.

교과 내용을 재미있게 구성하는 손쉬운 방법의 하나는 현실에서 접하는 사례나 과거 경험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이다. 자연과학이건 사회과학이건 이론의 출발점은 자연 현상이나 사회 현상이다. 현실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이론이 만들어지고, 각 이론은 주어진 질문의 핵심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적당한 추상화의 과정을 거친다. 비록 강의교재에는 딱딱한 공식으로 나열됐다 하더라도 교수는 그 배경이 되는 현실을 다양한 사례를 동원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접하는 사회 제도는 물론 다른 나라의 지나간 역사도 충분히 재미있는 강의 재료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이론이나 공식 몇 개 풀어 설명해주는 방식으로는 제대로 된 강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 강의 준비를 제대로 하려면 아주 많은 시간을 써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무리 잘 구성된 교과 내용이라도 듣는 사람이 오랜 시간 집중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선생 입장에서는 몇 시간도 쉬지 않고 강의할 수 있지만 학생은 다르다. 기계도 열이 나면 식혔다 사용해야 하듯이 강의 중간에 학생들의 뜨거워진(?)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유머를 제공하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런데 말이 그렇지 남을 웃긴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직업이 코미디언인 사람들도 웃기는 경우보다는 썰렁한 경우가 더 많다. 하물며 진지함의 대명사인 교수가 남을 웃긴다는 것은 고난도 과제다. 미리 준비해간 농담은 의외로 차가운 대접을 받으며 상처로 되돌아오기 일쑤다. 같은 내용의 농담이라도 누가 어떤 환경에서 말하느냐에 따라 웃기는 정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준비한 얘기보다는 수업 분위기에 얹어 무심결에 던진 한마디가 더 적중률이 높을 수 있다.

나는 내가 비교적 유머 있는 교수라 생각한다. 그런데 학생들 생각은 나와 다를 때가 많다. 이러니 마찰이 생길 수밖에. 하지만 그 숱한 실패에도 재도전의 용기를 잃지 않는다. 내 농담을 학생들이 재미없어해도 나는 혼자 즐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딱딱할 수밖에 없는 강의실에서 둘 중 하나라도 재미있으면 좋은 것 아닌가. 벌써 어디선가 돌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나는 태생적으로 유머 유전자를 타고난 부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루한 타입은 아니다. 모임이 있으면 보통 남보다는 잘 웃기는 편이다. 특별히 남을 웃기려고 따로 준비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나의 핵심 유머 코드는 ‘논리의 반전’이다. 그저 일상의 소재에서 뭔가 남과 다른 생각을 찾아 전하는 것이 내가 분위기를 바꾸는 방식이다. 예컨대 누군가에게 ‘너는 다른 것은 다 좋은데…’ 라고 말을 꺼냈다 하자. 당연히 상대는 다음 나올 말에 긴장하게 된다. 이럴 때 ‘이것이 더 좋아!’라고 말하면 상대는 긴장이 풀리며 절로 웃게 된다. 유학 시절 내 지도교수가 보스로 있던 연구소 직원들과 친했는데 하루는 두 여성분이 즐겁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한 친구가 상대에게 ‘You are crazy!’ 하면서 낄낄댔다. 그 옆을 지나가던 내가 본능적으로 ‘You, too!’라고 크게 소리쳤다. 물론 그냥 이렇게 말로 하면 별로지만 당시 주변 사람들 모두 한바탕 웃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나의 유머가 고난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교수로 부임해 첫 강의를 하던 날 내 나름 영어로도 남을 웃길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해 농담을 준비해갔다. 그런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문제는 이게 약 2~3분이 넘는 긴 내용인데다 종이에 써서 달달 외운 것이라 도중 멈출 수도 없었다. 그때 강의실에 흐르던 어색한 침묵은 지금도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다. 하지만 상처는 상처고 도전은 도전이다. 이후에도 굴하지 않고 노력한 덕에 강의가 재미없다는 평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공한 경우는 따로 준비한 농담이 아니라 강의 도중 자연스럽게 나온 상황 반전 코멘트가 대부분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우리 말로 강의를 시작하며 나는 당연히 내가 재미있는 교수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런데 10년이 넘는 외국 생활 탓에 학생들 눈높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마침 우연히 만난 조카에게 부탁해 몇 가지 재료를 갖춘 다음 수업 시간에 하나씩 써먹었다. 첫 농담에 학생들이 와~ 하고 놀라며 웃었다. 자신감이 생긴 나는 재고가 소진될 때까지 좌충우돌했다. 한 쪽에서 ‘교수님, 추워요’라는 소리가 들렸는데 나는 이를 소름끼치듯 즐거웠다는 반응으로 해석했다. 며칠 후 학생 몇 명이 방에 들려 조심스레 운을 뗐다. ‘처음에는 외국서 막 오신 교수님 체면 생각해 웃어드렸는데, 그냥 놔두면 나중에 더 큰 상처 입으실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요….’ 참고로 내게 유머를 전수한 내 조카는 당시 초등학생이었다.

‘참새 열 마리가 나란히 전깃줄에 앉아 있는데 포수가 앞에서 총을 쐈다. 마지막 참새가 죽었다. 왜일까. 첫 번째 참새가 “앗, 총알이다” 외치며 고개 숙여 총알을 피했고 나머지 새들도 이 동작을 반복했다. 그런데 아홉 번째 참새가 마침 어제 이를 빼 발음이 샜다. 열 번째 참새는 “앗, 콩알이다”라고 하는 줄 알고 입을 쫙 벌려 받아먹었다.’

‘지네와 개미가 가위바위보를 해서 지는 사람이 아이스크림을 사 오기로 했다. 개미가 져서 나갔는데 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지네가 방문을 열어보니 개미가 지네 신발을 하나씩 던지며 어딘가 묻혀 있을 자기 신발을 찾고 있었다. 답답해진 지네가 자기가 다녀온다며 나갔다. 개미가 아무리 기다려도 지네가 돌아오지 않아 방문을 열었더니 지네가 여전히 신발을 신고 있었다.’

대충 이런 농담이 이어지니 썰렁하다 못해 춥다는 원성까지 나온 것이다. 어쨌거나 귀국 후 첫 강의에서 난타당한 나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보복이 하고 싶었다. 중간고사에 보너스 문제를 하나 추가했다. ‘개미가 지네에게, “지네야, 넌 다리가 참 많구나”라고 말했다. 개미의 발언을 ‘수업 중 배운 통계를 보는 법’ 관점에서 평가해 본다면?’ 그냥 들으면 황당하겠지만 이미 수업 중 어느 정도 힌트를 준 문제였다. 예컨대 교수와 학생이 진 빚을 단순히 절대액으로만 비교하면 곤란하다. 교수 부채의 절대치가 높더라도 소득대비 비중은 훨씬 더 낮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비중이 예전에 비해 늘고있는 지와 같은 추세도 고려해야 한다. 나아가 비교 대상이 적절한지도 생각해야 한다. 

사실 이 문제는 만날 이론 공식만 달달 외는 학생들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엉뚱한 생각을 해보라는 것이 취지였다. ‘지네와 개미는 종이 다르므로 애초에 적절한 비교 대상이 아니다’ 정도의 가벼운 답을 기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학생들은 몹시 당황했었던 것 같다. 황당무계한 답들이 쏟아져 나왔다. 명목과 실질의 차이를 응용해 ‘지네의 명목 다리는 많지만, 사용하는 실질 다리는 몇 개 안 되므로 개미가 낙망할 것 없다’고 쓴 답도 있었고, ‘지네는 다리가 퇴화되는 중이고 개미는 다리가 늘고 있는 추세라 개미가 실망할 것 없다’라는 답도 보였다. 나의 보복은 유쾌했고 기분 좋게 모두 맞는 답으로 처리했다.

이상은 웃자고 한 얘기지만 실제 나는 강의나 시험문제에 현실 사례를 많이 응용한다. 내 전공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사회과학 이론이 현실과 괴리되는 것은 코미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이 강한 탓이 크다. 나는 변별력을 높인다고 중요하지 않은 부분에서 골라 시험을 내는 교수를 혐오한다. 시험도 공부의 일환이다. 당연히 중요한 주제부터 문제를 내는 것이 교수가 가져야 할 기본 자세다. 같은 문제라도 어떤 방식으로 출제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난이도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우리 학생들은 공식을 달달 외는 데는 강해도 조금만 현실 사례를 응용해 문제를 내면 대부분 고전한다. 

사실 배우는 과정의 첫 단계는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문제만 알면 해답은 쉽게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 교육은 해답 자체를 외우도록 강요하는 측면이 크다. 그러다 보니 같은 문제인데도 조금만 현실 응용이 들어가면 지레 겁을 먹는 학생들이 많다. 주입식 입시교육을 거쳐 대학에 들어왔는데도 여전히 상당수 과목에서 이론 공식이나 익히는 공부를 하는 답답한 우리 현실이 원인일 것이다. 

나 자신도 대학 시절 이론과 현실을 적절히 섞어 강의한 수업을 들은 기억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때보다 지금이 얼마나 더 나아졌는지 잘 모르겠다. 경제학을 무슨 수학이나 통계학의 파생 학문 정도로 이해하는 교수도 적지 않다. 수준 높은 이론 분석에는 수리계량적 기법이 필요하지만 경제학은 사회를 설명하는 학문이고 이를 배우는 학생들은 이론이 현실을 바탕으로 정립되는 과정과 현실이 이론을 통해 설명되는 방식을 제대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바꾸어 말해, 해답을 암기시키기 전에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도록 가르치는 수업이 되어야 한다.

물론 나처럼 실력은 별로면서 썰렁한 농담으로 웃겨나 보려는 교수보단 엄숙해도 제대로 가르치는 분이 백배 낫다. 하지만 같은 내용이라면 좀 더 학생들 눈높이에서 문제를 이해하고 풀어가는 친절한 수업이 좋을 것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수업 준비를 더 많이 해야 한다. 내가 아는 것과 남을 가르치는 것 사이에는 깊은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강의 경험이 많다고 좁혀지는 것이 아니다.  이십 년 넘게 교수인 나지만 ‘잘 가르치는’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11.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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